우리에게 잘 알려진 무학 대사와 태조 이성계에 관한 일화입니다.

어느 날 둘이 만나 대화가 무르익어 갈 무렵 태조가 입을 열었습니다.

 “오늘은 군신(君臣)의 예를 떠나서 모처럼 농담이나 합시다.”

“좋습니다, 전하!” “그럼 내가 먼저 하겠소.

대사께서는 그간 산중에서만 지낸 탓인지 얼굴이 흡사 산돼지 같구려.” 그러자 무학 대사가 말을 받았습니다.

 “하하하, 전하의 얼굴은 흡사 자비하신 부처님을 꼭 닮았습니다.” “내가 농담을 청했는데 농담이 아닌 아첨을 하다니요?”

 “전하, 부처님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이지요.”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담겨진 대로 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든 사람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사랑을 알아볼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장자(莊子)의 예리한 통찰 중의 하나는 “참사람〔眞人〕만이 참지식〔眞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순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장 깨끗한 것까지도 더럽게 보입니다.
우리 눈에 다른 사람의 단점이 자꾸 보이는 것은 내 안에 사랑이 없고 마음이 메말랐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 든다는 것은 내 마음속에 그만큼 교만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것은 내 안에도 사랑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존경스럽고 귀하게 보인다는 것은 내가 그러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 마음에 비추어진 상대방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입니다.

상대방은 나를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201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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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하는 데 파견되었던 제자들은 돌아와 예수님께 자신들이 한 일을 보고합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할 때에 자신들의 능력과 재주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그들은 기쁨에 넘쳐 스승님께 돌아왔습니다.
자연의 오묘한 섭리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가을입니다.

‘가을’ 하면 단풍과 낙엽이 떠오르듯이, 이 시기가 되면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파견된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하였듯이, 가을이 되니 하느님께 무엇을 보고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곱게 물든 단풍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에 제 자신의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꾸몄는지 성찰해 봅니다.

지는 낙엽을 통해 우리 인생 또한 유한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사랑을 위해 가꾸어야 할 과제이며, 사랑은 완성해 나가야 할 숙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2012.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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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반벙어리 이방인을 고쳐 주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제대로 말을 하게 됩니다.

성서학자들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반벙어리 이방인이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곧, 평소 살아가면서 닥친 어떤 불행으로 말미암아 언어 장애를 얻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듣기와 말하기의 장애 이상으로 총체적인 삶의 위기를 맞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말이 안 나온다." 또는 "기가 막힌다." 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나의 어려움을 하소연할 곳이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겪는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가슴이 답답한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반벙어리도 그러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위기를 맞은 그의 처지를 헤아리셨습니다.

그리고 따스한 마음과 관심으로 다가가시어 그를 고쳐 주십니다.

 

'장애인' 하면 흔히 육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장애인도 있습니다.

마음에 미움, 편견, 이기심, 탐욕이 가득 차 있으면  그 사람 또한 영적인 장애입니다.

마음이 무디어 다른 사람의 아픈 처지를 외면하는 것도 영적인 장애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열린 귀로 무엇을 듣고 있으며, 풀린 혀로 무슨 말을 하고 사는지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픈 사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을 많이 하기를 바랍니다.

(2012.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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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음미할수록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매일의 도전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사실 원수에게 고통을 주려면 자기 자신은 몇 배의 고통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잘해 주기란 여간 어려운일이 아닙니다.

 

인도의 민족 운동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가난하고 경건하며 비폭력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 붙여진 '마하트마'라는 이름은 그의 본래 이름이 아니라 사람들이 부여한 명예로운 호칭입니다.

'마하트마'라는 말은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1948년 기도하러 가던 중 힌두교의 광신자가 쏜 총에 맞았습니다.

그는 죽어 가면서 살인자를 향해 머리를 돌렸지만 살인자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그는 힘이 빠진 손을 자신의 가슴과 얼굴을 거쳐 이마에 올려놓았습니다.

화해의 표시였습니다.

이것이 이세상을 향한 간디의 마지막 동작이었습니다.

간디를 '위대한 영혼'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 길은 우리 마음을 하느님의 사랑에 깊게 뿌리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면 그 열매 또한 사랑으로 맺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는 원한을 사랑으로 갚는 사람입니다.

(2012.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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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가톨릭 문학의 거장인 프랑스의 소설가 베로나노스 쓴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시골 본당에 부임한 젊은 신부가 거룩하고 옳은 길을 걸으면서 겪은 고뇌와 고통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골 신부는 사목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 속에서 하느님 은총의 참다운 뜻을 깨닫습니다.

소설은 신부의 이러한 독백으로 끝맺습니다.

 "아무려면 어떠한가. 모든게 은총인 것을."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모든 것을 함께 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부터 십자가 아래까지 주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종으로서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을 감수하셔야 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제자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일생 자신을 비우시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기에

하늘에 오르시는 영광과 행복을 누리실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생애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은총의 전구자이십니다.

허영자 마리로사 시인이 쓴 '전구자'라는 시의 일부를 묵상하며 성모님의 승천을 함께 기뻐합시다.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 아름다운 다리는/ 무지개입니다.//

천주님과 사람 사이를 잇는/ 무지개 다리는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우리가 기쁘고 즐거울 때도/ 당신은 함께하시지만/

더 많이 우리가 슬프고 괴로울 때/ 근심의 이마를 짚어 주시는 어머니//

그러하기에/ 자비로우신 전구자이신/ 당신 승천의 영광은/ 저토록 광휘롭습니다.

(2012.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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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가 쓴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돌”이라는 짧은 단편 소설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두 여인이 현자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 가운데 한 여인은 자신을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른 한 여인은 한평생 율법을 지키며 이렇다 할 죄를 짓지 않고 살아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현자는 먼저 첫 번째 여인에게 “울타리 밖에 나가 당신이 들 수 있는 큰 돌을 하나 찾아 가지고 오시오.” 하고, 또 다른 여인에게는 “그대는 가능한 한 많은 돌을 가져오되 작은 돌만 가져오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현자는 그 여인들에게 가지고 온 돌을 다시 가지고 가서 제자리에 놓으라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여인은 돌이 있었던 곳을 금방 찾아내어 그것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여인은 어디서 어떤 돌을 주웠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서 시키는 대로 하지 못하고 다시 현자에게 돌아왔습니다.

 

현자는 그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저 여인은 자신이 어디서 그 돌을 주웠는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크고 무거운 돌을 쉽게 제자리에가져다 놓을 수 있었고, 그대는 어디서 그 많은 작은 돌을 주웠는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거요. 죄도 마찬가지라오.”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이 자유로워지고,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데 필요한 것은 양심 성찰입니다. 양심 성찰은 우리의 결점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언제, 어떻게 우리가 잘못했는지를 의식하고 잘못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양심 성찰은 또한 하느님의 치유 능력에 우리 마음을 여는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통로입니다.(2012.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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